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벨 1세 (문단 편집) === 부부왕의 치세 ===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에는 스페인이라는 연합체가 탄생하였고, 이사벨 여왕은 남편인 페르난도에게 '스페인 왕국은 남편과 공동 통치하지만, 카스티야의 정권에 대해서는 아라곤의 국왕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래서 이사벨은 남편의 나라 아라곤에, 페르난도는 아내의 나라 카스티야에 대해 통치자의 배우자로서 관여할 수는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공동통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상 통일 스페인 왕국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 이사벨 1세의 통치기였기에 사실상 두 나라가 통일되어 [[스페인]] 왕국이 만들어진 게 이 때라고 보기도 한다. 1492년에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이베리아의 반도의 남부,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를 정복했다. 그라나다는 스페인 통일에 있어 마지막 거점이었다. 이건 역대 국왕들이 꿈꾸던 스페인 통일을 그녀가 페르난도와 힘을 합쳐 해냈다는 것, 즉 [[레콩키스타]]를 완성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사벨 1세는 세제의 개혁, 군의 정비, 종교 재판 도입 등의 일을 하며 [[스페인]]을 다스렸다. 또한 이사벨 1세는 1492년부터 시작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을 지원해준다.[* 참고로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왕국은 콜럼버스의 탐험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를 후원한 건 전적으로 이사벨의 카스티야 왕국 만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이익도 카스티야가 주로 누리게 된다.] 이때 즈음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설치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그라나다와 전쟁 중이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신하들은 이 무리한 투자를 맹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그녀는 산타페 양해각서까지 체결하면서 콜럼버스의 모험을 지원해주었다. 이사벨 1세는 당시 국외로 영토를 개척하는 사업에 확고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우수한 항해사를 바다로 보내 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 아프리카 서해안을 가진 포르투갈에게 뒤져서는 결코 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콜럼버스는 의도치 않았지만 행운에 힘입어 아메리카의 존재를 알리게 되며 상당한 이익을 가져오게 된다. 가톨릭 부부왕의 경우 두 사람 사이에는 평생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기인했는데, 카스티야의 국력이 아라곤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나라의 결합에 있어서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분할해서 상속받을 수 없다는 조항에 서명해야 했다. 또한 당시의 남성우월주의 사상에도 불구하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그리거나 조각할 때는 반드시 두 사람이 완벽히 같은 크기로 묘사되어야 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예술 작품에서 가부장적 주의에 입각해 남편을 아내보다 크게 그리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렇게 당대 남성들과는 달리 아내의 권리를 넘보지 못하고 동등하게 지낸 페르난도는 이사벨의 사망 이후에 카스티야를 아라곤에 합병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재혼한 부인 제르멘 드 푸아(Germaine De Foix)에게서 상속자를 생산하지 못했고[* 아들 1명이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이사벨 생전의 조약에 의해 두 사람의 차녀 후아나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모두 상속받게 된다. 이 후아나와 카스티야 왕의 사위-남편 자격만 있던 후아나의 남편 펠리페 사이의 아들 [[카를로스 1세]][* 카를 5세]의 대에 이르러 완전히 통합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